칭기즈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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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칭기즈 칸은 1160년경 몽골에서 태어난 인물로, 몽골 부족을 통일하고 몽골 제국을 건국하여 유라시아 세계관을 변화시켰다. 그는 칭기즈 칸 훈장을 제정하고, 몽골의 건국 아버지로 추앙받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정복 과정에서 자행된 잔혹 행위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칭기즈 칸은 몽골의 종교적 인물이자 국가 영웅으로, 현대 몽골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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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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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칭기즈 칸 |
본명 | 테무진 |
칸호 | 칭기즈 칸 () |
만주몽골 문자 | }} |
몽골어 (만주몽골 문자) | }} |
문화어 | 칭기스 한 |
영어 | Genghis Khan |
출생 | 년 |
출생지 | 헨티 산맥 |
사망 | 1227년 8월 |
사망 장소 | 싱칭, 서하 |
매장지 | 알 수 없음 |
아버지 | 예수게이 |
어머니 | 호엘룬 |
배우자 | 보르테 기타 |
자녀 | 조치 차카타이 오고데이 톨루이 기타 |
통치 정보 | |
작위 | 몽골 제국의 칸 |
재위 기간 | 1206년 – 1227년 8월 |
계승자 | 톨루이 (섭정) 오고데이 칸 |
왕조 | 보르지긴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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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테무진 () |
칭호 | 칭기즈 칸 (; ) |
추가 정보 | , }} |
2. 역사적 배경
칭기즈 칸은 몽골에서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는다.[53] 칸이 되기 이전에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몽골 연맹을 통합하여, 흩어져 있던 부족들에게 동질감을 형성하였다.
몽골 고원의 유목민들은 끊임없이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며, 정착 문명과의 관계 속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칭기즈 칸은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대에 등장하여, 유목민 부족들을 통합하고 강력한 몽골 제국을 건설했다.
유목민들은 기동성이 뛰어나 물자 보급이 필요 없었지만, 세력 확장 이후 중국인들에게 동화되었다. 이후 중국에 강력한 제국이 들어서고 유목민들은 분열되었다. 이러한 흥망성쇠는 계속 반복되었다. 하지만 원나라의 붕괴는 전염병으로 인한 유라시아의 붕괴와 국제무역 축소로 인한 통치 자금 부족이 원인이었고, 몽골족은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돌아갔다.
칭기즈 칸은 몽골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 몽골 제국은 인구학과 지정학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켰다.[53] 몽골 제국의 영토는 현대의 몽골, 중국,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몰도바,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이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 일부, 터키 일부를 포함한다.[53] 1260년 봄, 몽골군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를 출발하여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까지 진출했다.[54]
몽골어에는 보편적인 로마자 표기법이 사용되지 않아, 몽골 이름의 현대적 표기는 매우 다양하며, 원래 발음과 상당히 다를 수 있다. "칭기즈"라는 경칭은 ᠴᠢᠩᠭᠢᠰ|Činggismn에서 파생되었다.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이 1271년에 원나라를 세웠을 때, 할아버지에게 묘호 "태조"(太祖|최고 시조중국어)와 시호 "성무황제"(聖武皇帝|성스러운 무술 황제중국어)를 내렸다.
2. 1. 유목민과 정착민의 관계
유사 이래 유목민과 정착민은 늘 접촉 관계를 유지했다. 이 두 사회는 정반대되는 생활 양식을 유지했기 때문에 늘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 의존적인 처지에 있었다.북방의 유목민들은 남부 지역의 일부 주요 산품과 그 지역의 사치품들을 필요로 했다. 유목민들이 이같은 물품을 얻는 방법은 무역, 대상(隊商), 무력 약탈의 세 가지가 있었다. 중국의 정착민들은 유목민들이 사는 스텝 지역의 생산품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유목족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유목민들의 침입을 막아야만 했다.
2. 2. 유목민의 단합과 분열
스텝 지역 유목민들의 단합과 분열은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라 결정되었다. 유목민들은 세력이 강성할 때 결단력 있는 지도자를 옹립하여 다른 유목민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 후 중국의 왕조가 쇠망의 길을 걷고 있으면 그들의 세력을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유목민들이 이같이 세력을 확장하여 남방 정착민들의 문화를 수용하게 되면 결국에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유목민들은 원래 기동성이 뛰어나 후방에서 별도의 물자 보급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세력 확장 이후에는 이 전통적인 우월성을 상실해 끝내는 그들이 복속시킨 중국인들에 의해 동화되고 말았다. 그 후 중국에는 다시 강력한 제국이 일어나고 유목민들은 족장들끼리 끊임없이 싸움을 벌여 분열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흥망성쇠는 계속 반복되었다. 반론 - 원나라의 붕괴는 강력한 전염성 질환에 의한 유라시아의 붕괴가 직접 원인이다. 이로 인한 국제무역이 축소되어 통치 자금의 부족을 초래하고 몽골족은 중앙아시아의 초원으로 회귀하게 된 것이 원의 소멸이다.
2. 3. 칭기즈 칸의 현실 이해
칭기즈 칸은 자신의 부족 내에서 재통일의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당시 중국을 비롯한 정착 문화를 가진 국가들이 쇠퇴하고 있음을 인지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칭기즈 칸은 정복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부족뿐만 아니라 다른 부족들에게도 충성을 요구하며 몽골 제국의 기반을 다졌다.3. 생애
칭기즈 칸은 1160년경 오논강 인근 델리운 볼락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예수게이는 키야트 부족[49]의 지도자였고, 어머니는 호엘룬이다. 칭기즈 칸의 탄생년도는 1162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1155년, 1163년, 1167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50] 현재 몽골에서 칭기즈 칸의 탄신일로 기념하는 날은 1162년 11월 14일이다.[50] 아버지 예수게이는 타타르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테무진 우게라는 인물의 이름을 따서 테무친이라 이름을 지었다.[51]
테무친은 옹기라트부 출신 호엘룬 외에도 소치겔이라는 부인에게서 태어난 이복형 벡테르와 벨구테이가 있었다. 친동생으로는 주치 카사르, 카치운, 테무게 옷치킨 등이 있었다. 훗날 칭기즈 칸으로 불리는 테무친은 보르지긴 씨족의 몽골 부족에서 태어났다.[51] 그는 전설적인 군벌 보돈차르 뭉카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추장 예수게이와 그의 본부인 호엘룬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호엘룬은 원래 올호노드 씨족 출신으로 예수게이가 그녀의 메르키트 신랑 칠레두에게서 납치해 온 여성이었다.[51]
테무친의 출생을 둘러싼 몇 가지 전설이 있다. 가장 유명한 전설은 그가 손에 혈병을 쥐고 태어났다는 것으로, 이는 아이가 전사가 될 것이라는 아시아 민간 설화에 자주 등장한다.[51]
9세 때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족에게 독살당하면서, 테무진의 가족은 부족에서 추방당하고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11] 예수게이는 아들 테무진의 배우자를 정하러 옹기라트 부족의 족장을 만나 그의 딸 보르테를 테무진의 약혼자로 정하고 오던 길에 타타르족의 막사에서 며칠을 보냈는데, 몽골 부족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타타르족은 예수게이를 독살하였다.
테무진은 이복형 벡테르를 활로 쏴 죽인 일로 타이치우드 가문의 타루구타이 키릴토쿠에게 감금되었으나,[12] 스루도스 부족의 소르칸 시라 등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12] 이후 테무진은 보오르추, 젤메, 치라운 등과 친구가 되었고, 이들은 훗날 칭기즈 칸의 사준사구 중 사준이 되었다.
예수게이와 안다(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부의 부족장 토그릴 완 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12] 테무진은 토그릴에게 값비싼 담비 모피 코트를 선물했고, 토그릴은 케레이트 부족의 칸(지배자)으로서 테무진을 자신의 보호 아래 두었다.[12]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에게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고 테무진의 어릴 적 친구인 자무카를 설득하여 병력을 제공하게 했다.[12]
테무진은 1182년에 키야트 부족의 부족장으로 선출되었다.[12]
얼마 후, 예수게이가 호엘룬을 납치한 것에 대한 복수를 위해 약 300명의 메르키트족이 테무진의 진영을 습격했다. 테무진은 부르칸 칼둔 산에 피신했지만, 보르테와 소치겔이 납치되었다. 테무진은 토그릴과 어린 시절 친구였던 자다란 부족의 수장 자무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두 지도자는 2만 명의 전사를 동원하여 메르키트족을 공격했고, 보르테는 무사히 구출되어 곧 주치라는 아들을 낳았다. 테무진은 주치를 자신의 아들로 키웠지만, 주치의 혈통에 대한 의문은 평생 동안 따라다녔다.[12]
테무진은 이후 10년 반 동안 보르테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차카타이, 오고타이, 툴루이)과 네 딸(체체이겐, 알라카, 투멜룬, 알-알탄)을 더 낳았다.
테무진은 조직적으로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친구이자 오랜 동료였던 자무카가 조직한 여러 세력의 연합은 그에게 패배를 거듭하여 그 존재가 없어졌고, 타타르족은 몰살당했다. 한편 케레이트족의 왕 토그릴과의 동맹관계도 마침내 붕괴되었고, 테무진은 그마저도 최고 권력을 잡는 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여 제거하려 했다.
1202년 테무진은 나이만, 메르키트 부족 연맹을 격파하고 고원 중앙부의 패권을 차지했다. 옹 칸과의 결혼 동맹이 무산되고, 1203년 옹 칸의 기습을 받았으나, 발주나 호수에서 군대를 재정비하여 케레이트 본대를 급습하여 대승했다.[12]
1205년 테무진은 서나이만부와 북메르키트 부족을 격파하고, 동지에서 적이 된 자무카를 마침내 잡아 처형했다. 자무카는 부하들의 배신으로 테무진에게 넘겨졌으나, 그는 배신한 자무카의 부하들을 처형하고 자무카는 피를 보지 않게 처형했다고 한다.
1206년 테무진은 쿠릴타이를 소집했고, 그해 2월 오논강변에서 열린 족장대회의에서 칭기즈 칸('전 세계의 군주'라는 뜻)으로 추대되었다.
1206년은 몽골과 세계 역사에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칭기즈 칸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몽골족은 통일되었고, 새로운 조직으로 재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이 활발한 정복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유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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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능력 위주 인사행정 | 계급이 미천하더라도 능력이 있다면 중용했고, 능력이 없으면 강등했다. |
개방적인 인재 흡수 | 이민족 출신도 능력만 있다면 받아들였다. |
뛰어난 군사력 | 승마 능력과 기동성이 뛰어난 군대를 보유했다. |
정확한 정보 수집 | 상인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
종교적 관용 | 기독교, 이슬람 등 다른 종교를 존중했다. |
내분 조성 | 정복 대상 국가가 다종교 사회인 경우, 특정 종교를 지지하여 내분을 유도했다. |
학식 활용 | 야율초재와 같은 학자를 등용하여 학식을 이용했다. |
칭기즈 칸은 군사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급변하는 외부 환경에 잘 적응했다. 처음에는 그의 군대가 사료가 필요 없는 튼튼한 초식동물인 몽골 조랑말을 타는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곧 몽골군은 투석기, 쇠뇌, 사다리와 끓는 기름 등을 사용하여 규모가 큰 성읍도 함락시킬 수 있었고, 흐르는 강물을 다른 데로 돌려놓아 홍수가 일어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1209년 서하는 칭기즈 칸에게 복속하여 몽골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같은 해 톈산 위구르 왕국을 복속시키고 경제 감각이 뛰어난 위구르인의 협력을 얻는 데 성공한다.[1]
1213년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를 공략, 만리장성 이남의 금나라 영토를 정복했다.[1] 1214년 칭기즈 칸은 금나라와 화약을 맺고 일단 군사를 후퇴시켰지만, 화약 직후 금나라가 황하 남쪽의 옛 북송의 도읍 개봉으로 수도를 옮기자 칭기즈 칸은 이를 배신 행위로 규정하고 다시 금나라를 공격했다.[1]
쿠츨루크는 나이만 부족 연합 부족장의 아들로, 나이만족이 멸망한 뒤 서요로 망명하여 야율직로고의 보호를 받으며 그의 사위가 되었다. 그러나 쿠츨루크는 야율직로고를 배신하고 왕위를 찬탈했다.[1] 칭기즈 칸은 장군 제베에게 2만 군을 주어 선봉대로 보내 쿠츨루크를 맡도록 했다.[1]
칭기즈 칸은 450명의 이슬람 대상단이 몰살당한 사건을 계기로 호라즘 샤 정벌에 나섰다.[1] 몽골군은 가는 곳마다 도시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몰살시키는 등 잔혹한 행위를 자행했다.[38]
칭기즈 칸은 주변 국을 확장해나가면서 자신에게 협력할 경우 자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러 가지 혜택을 부여했다. 그러나 반항하게 되면 그 지역 전체를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조리 멸족시켰는데, 전멸시킨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서 탑을 쌓았다.[2]
칭기즈 칸은 중앙아시아 원정에서 돌아온 후 영지를 분할하여 주치에게는 남서 시베리아에서 남쪽 러시아 땅 및 미래에 정복할 수 있는 모든 토지를, 차가타이에게는 중앙아시아와 서요의 옛 땅을, 우구데이에게는 서쪽 몽골 및 위구르, 나이만, 타타르, 중가리아의 지배권을 주었다. 칭기즈 칸에게 종주권을 약속한 서하의 황제가 호라즘 원정에 원군을 보내는 것을 거절하자, 칭기즈 칸은 이를 괘씸히 여겨 다시 서하 공격을 선언했다.[60]
1226년 가을, 칭기스 칸은 서하에 대한 재원정을 개시했다. 칭기스 칸은 사고로 말에서 낙마한 뒤에 열병을 겪었고, 이에 아들들은 원정을 만류했지만 칭기스 칸은 원정을 강행했다. 칭기스 칸은 우선 서하에 사신을 파견해 서정에 동반하지 않고 그 자신을 모욕한 것을 책망하며 항복을 제의했으나, 서하는 이를 거부했다.[60]
1227년 8월 18일[66] 또는 8월 25일[67], 칭기스 칸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서하의 수도 흥경은 함락되고 그 주민들은 학살당했다.[67]
몽골고원으로 옮겨져 기련곡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지지만, 그 위치는 비밀에 부쳐졌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의하면 칭기즈 칸의 시신을 운반한 사람은 비밀 유지를 위해 모두 살해되었다고 한다. 또한 매장된 후에는 몽골은 그 증거를 없애기 위해 1천 마리의 말을 몰고 일대의 땅을 완전히 밟아 다졌다고 한다.[44]
3. 1. 초기의 투쟁 과정

테무진은 1160년경 오논강 인근 델리운 볼락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키야트 부족[49]의 예수게이이고, 어머니는 호엘룬이다. 칭기즈칸의 출생년도는 1162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1155년, 1163년, 1167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50] 현재 몽골에서 칭기즈 칸의 탄신일로 기념하는 날은 1162년 11월 14일이다.[50] 아버지 예수게이는 타타르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테무진 우게라는 인물의 이름을 따서 테무친이라 이름을 지었다.[51]
테무친은 옹기라트부 출신 호엘룬 외에도 소치겔이라는 부인에게서 태어난 이복형 벡테르와 벨구테이가 있었다. 친동생으로는 주치 카사르, 카치운, 테무게 옷치킨 등이 있었다.
칭기스 칸의 부족인 몽골 부는 위구르 제국이 해체된 후 바이칼 호수 방면에서 남하해 몽골고원의 북동부에 퍼져 살았다. 칭기스 칸의 가계인 보르 지긴의 선조가 되는 보돈차르 몽학은 알란 구아가 낳은 아들 중 막내이다. 보돈차르의 자손은 번창하여 다양한 씨족이 나왔고 우리양카이 가문, 자라이르 부족 등을 형성했다. 보돈차르의 7대손 카불 칸이 처음 몽골족의 지파를 통일하고 대 칸의 칭호를 획득했다. 카불 칸의 후계자는 그의 6촌인 암바가이 칸이었다. 뒤에 카불 칸의 후손들은 키야트 가문, 암바가이 칸의 자손은 타이치우드 가문으로 분화되었다. 칭기즈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카불 칸의 손자 3대 쿠툴라 칸의 조카였다.
테무진은 열다섯 살이 되어 성년이 되자 보르테와 결혼했다. 테무진은 케레이트 부족의 칸 토그릴에게 값비싼 담비 모피 코트를 선물하였다. 토그릴은 예수게이와 안다|안다mn 조약을 맺은 사이였다. 이후 테무진은 젤메 등을 추종자로 만들기 시작했다. 테무진과 보르테는 코진이라는 딸을 낳았다.
얼마 후, 메르키트족이 테무진의 진영을 습격했다. 테무진은 부르칸 칼둔 산에 숨었지만, 보르테는 납치되었다. 테무진은 토그릴과 자다란 부족의 수장 자무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두 지도자는 2만 명의 전사를 동원하여 메르키트족을 격파하고 보르테를 구출했다. 보르테는 곧 주치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테무진이 그를 자신의 아들로 키웠지만, 그의 진짜 혈통에 대한 의문은 주치의 일생 동안 따라다녔다. 그 후 10년 반 동안 테무진과 보르테는 세 아들(차카타이, 오고타이, 툴루이)과 네 딸(체체이겐, 알라카, 투멜룬, 알-알탄)을 더 낳았다.
테무진과 자무카는 1년 반 동안 함께 야영했는데, 《몽골비사》에 따르면 그 기간 동안 안다|안다mn 조약을 다시 맺었다고 한다. 그러나, 라트체프스키는 테무진이 메르키트족에 대한 도움의 대가로 자무카의 봉사를 받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긴장이 고조되어 두 지도자는 헤어졌다. 테무진은 독립적인 추종자를 만들기 시작했고, 수부타이, 우량카이족, 바를라스족, 올코누드족 등이 테무진을 지지했다.
테무진은 곧 그의 가까운 추종자들에 의해 몽골의 칸으로 추대되었다. 토그릴은 기뻐했지만 자무카는 분개했다. 약 1187년에 두 지도자는 달란 발주트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테무진은 패배했다.
라트체프스키와 티모시 메이와 같은 현대 역사가들은 테무진이 달란 발주트 전투 이후 10년 동안 금나라의 신하로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자오홍은 훗날 칭기스 칸이 금나라의 노예로 몇 년을 보냈다고 기록했다.
3. 1. 1. 탄생
테무친은 보르지긴 씨족의 몽골 부족에서 태어났다.[51] 전설적인 군벌 보돈차르 뭉카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추장 예수게이와 그의 본부인 호엘룬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호엘룬은 원래 올호노드 씨족 출신으로 예수게이가 그녀의 메르키트 신랑 칠레두에게서 납치해 온 여성이었다.[51] 그의 출생 이름의 유래는 논쟁의 대상이다. 가장 초기의 전통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타타르족과의 성공적인 원정에서 테무친-우게라는 포로를 데리고 돌아온 직후였고, 승리를 기념하여 갓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51]
훗날 칭기즈 칸으로 불리는 테무친은 1160년경 오논강 인근 델리운 볼락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키야트(걸안) 부족[49]인 아버지 예수게이와 어머니 호엘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예수게이는 소치겔이라는 여성에게서 이복 형 벡테르와 벨구테이가 있었고, 메르키트족에게 시집가는 호엘룬을 약탈하여 결혼, 테무친이 태어났다. 친동생으로 주치 카사르, 일찍 요절한 카치운, 동방에 영지를 받은 테무게 옷치킨 등이 태어났다.
칭기즈칸의 출생년도는 1162년에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역사서마다 달라서 1155년, 1163년, 1167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현재 몽골에서 기념하는 칭기즈 칸의 탄신일은 1162년 11월 14일이다.[50] 칭기즈 칸이 태어날 당시 아버지 예수게이가 테무진 우게가 이끄는 타타르족과의 전투를 승리했는데. 예수게이는 이 테무진 우게의 이름을 따서 태어난 아이에게 테무친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테무친의 출생을 둘러싼 몇 가지 전설이 있다. 가장 유명한 전설은 그가 손에 혈병을 쥐고 태어났다는 것으로, 이는 아이가 전사가 될 것이라는 아시아 민간 설화의 모티프이다.[51] 다른 사람들은 호엘룬이 아이의 운명을 알리는 빛줄기에 의해 잉태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신화적인 보르지긴 조상 알란 고아의 전설을 반영한 것이다.[51] 예수게이는 이를 길한 징조로 생각하여 패배한 타타르 군주, 테무진 우게의 이름을 따서 자식에게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51] 칭기즈 칸의 이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으로는 ‘테무진’이 ‘대장장이’라는 뜻임을 근거로 당시 사대부 사회에서 쇠가 중요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52]
아버지 예수게이는 옹기라트부 출신 호엘룬 외에도 먼저 부인 소치겔과 그 사이에서 아들 벡테르, 벨구테이가 있었다. 집안이 한미했던 소치겔은 예수게이의 본 부인임에도 호엘룬에게 정실 부인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예수게이와 호엘룬은 테무친 외에 카사르, 하치운, 테무게라는 세 아들과 테물룬이라는 딸을 두었다. 테무친은 또한 예수게이의 두 번째 부인 소치겔에게서 베흐테르와 벨구테이라는 두 명의 이복 형제가 있었는데, 소치겔의 정체는 불확실하다. 형제들은 오논 강둑에 있는 예수게이의 주요 캠프에서 자랐고, 그곳에서 말 타는 법과 활 쏘는 법을 배웠다.[51]
3. 1. 2. 유년기의 불행
9세 때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족에게 독살당하면서, 테무진의 가족은 부족에서 추방당하고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11] 예수게이는 아들 테무진의 배우자를 정하러 옹기라트 부족의 족장을 만나 그의 딸 보르테를 테무진의 약혼자로 정하고 오던 길에 타타르족의 막사에서 며칠 보내게 되었는데, 몽골 부족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타타르족은 예수게이를 손님으로 받아들였다가 독살하였다.예수게이가 죽자 부족 사람들은 예수게이와 경쟁자 관계였던 타이치우트 일가의 사주를 받아, 예수게이의 미망인 호엘룬과 그 자녀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이들을 추방했다.[11] 이로 인해 테무진의 영세한 가문은 유목민의 일상음식인 양고기와 우유는 전혀 먹지 못하고 풀뿌리와 생선으로 연명하는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템진과 베크테르 모두 아버지의 상속자를 자처하며 긴장이 고조되었다. 템진은 예수게이의 정실 부인의 자식이었지만, 베크테르는 적어도 두 살 더 많았다. 심지어 레비레이트 법에 따라 베크테르가 성년이 되면 호엘룬과 결혼하여 템진의 의붓아버지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12] 사냥 전리품 분배를 둘러싼 잦은 분쟁으로 마찰이 심화되면서 템진과 그의 남동생 카사르는 베크테르를 매복하여 살해했다. 이 금기시된 행위는 공식 연대기에는 생략되었지만 《몽골비사》에는 기록되어 있으며, 호엘룬이 아들들을 화나게 꾸짖었다고 전한다.[12]
템진은 가족에게 동맹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번 포로로 잡혔다.[12] 타이치우드에 붙잡힌 그는 잔치 중에 탈출하여 처음에는 오논 강에 숨었고, 그 다음에는 강에서 그를 보고도 경보를 울리지 않은 소르칸-시라의 천막에 숨었다. 소르칸-시라는 템진을 개인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사흘 동안 보호한 후 탈출을 도왔다.[12]
3. 1. 3. 타이치우드 가문과의 갈등
테무진은 이복형 벡테르를 활로 쏴 죽인 일로 타이치우드 가문의 타루구타이 키릴토쿠에게 감금되었다.[12] 그러나 스루도스 부족의 소르칸 시라 등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12]이후 테무진은 보오르추, 젤메, 치라운 등과 친구가 되었고, 이들은 훗날 칭기즈 칸의 사준사구 중 사준이 되었다.
이후 행적은 사료에 따라 다른데, 《몽골 황금사》와 《몽골원류》에 따르면 테무진은 솔롱고(고려)에서 수년간 체류했다고 한다. 반면, 남송의 사신 조공(趙珙)의 《몽달비록》에 의하면 금나라에 끌려가 10년간 노예 생활을 했다고 한다.
3. 2. 토그릴 완 칸과의 협상
예수게이와 안다(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부의 부족장 토그릴 완 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12] 테무진은 토그릴에게 값비싼 담비 모피 코트를 선물했고, 토그릴은 케레이트 부족의 칸(지배자)으로서 테무진을 자신의 보호 아래 두었다.[12]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에게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고 테무진의 어릴 적 친구인 자무카를 설득하여 병력을 제공하게 했다.[12]테무진은 1182년에 키야트 부족의 부족장으로 선출되었다.[12]
3. 3. 권력자로 부상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안다(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부의 부족장 토그릴 완 칸을 찾아갔다. 테무진과 그의 가족은 보르지긴족들에게 배척받긴 했지만 왕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기 전에 정혼해준 아내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토그릴 완 칸은 당시 몽골 지역 안에서 가장 강대한 통치자였다. 테무진은 결혼기념물로 받은 담비 모피를 토그릴에게 선물했고, 답례로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의 흩어진 부족민들을 모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에게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고, 테무진의 어릴 적 친구인 자무카도 설득하여 병력을 제공하게 함으로써 그 약속을 지켰다. 테무진은 열다섯 살이 되어 성년이 되자 보르테와 결혼하기 위해 데이 세첸에게 돌아갔고, 토그릴에게 후원자를 찾아 그 코트를 다시 선물하기로 결정했다. 토그릴은 케레이트 부족의 칸(지배자)으로, 예수게이와 안다 조약을 맺었다.
그런데 자무카의 일족 중 한 사람인 다이차르가 테무진의 영지에 있던 말을 몰래 약탈하려다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테무진과 자무카는 서서히 멀어졌다. 테무진은 조직적으로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친구이자 오랜 동료였던 자무카가 조직한 여러 세력의 연합은 그에게 패배를 거듭하여 그 존재가 없어졌고, 타타르족은 몰살당했다. 한편 케레이트족의 왕 토그릴과의 동맹관계도 마침내 붕괴되었고, 테무진은 그마저도 최고 권력을 잡는 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여 제거하려 했다.
3. 3. 1. 메르키트족 정복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가 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 부족의 토그릴 완 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테무진은 결혼 선물로 받은 담비 모피를 토그릴에게 선물했고, 토그릴은 테무진의 흩어진 부족민들을 모아주겠다고 약속했다.[12]
얼마 후, 예수게이가 호엘룬을 납치한 것에 대한 복수를 위해 약 300명의 메르키트족이 테무진의 진영을 습격했다. 테무진은 부르칸 칼둔 산에 피신했지만, 보르테와 소치겔이 납치되었다. 족내 혼인법에 따라 보르테는 칠레두의 남동생과 결혼하게 되었다. 테무진은 토그릴과 어린 시절 친구였던 자다란 부족의 수장 자무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두 지도자는 2만 명의 전사를 동원하여 메르키트족을 공격했고, 임신한 상태였던 보르테는 무사히 구출되어 곧 주치라는 아들을 낳았다. 테무진은 주치를 자신의 아들로 키웠지만, 주치의 혈통에 대한 의문은 평생 동안 따라다녔다.[12]
테무진은 주르킨 부족을 제압하고 지도자들을 처형했다. 그는 벨구테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레슬링 경기에서 주르킨 지도자의 등을 부러뜨리게 했다. 이는 몽골의 정의 관습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이후 테무진과 토그릴은 메르키트족, 나이만족, 타타르족을 상대로 함께 또는 따로 전쟁을 벌였다. 1201년경, 옹기라트, 타이치우드, 타타르족 등은 자무카를 지도자로 추대하고 테무진과 토그릴에게 대항했지만, 예디 쿠난 전투에서 패배했다. 1202년, 테무진은 타이치우드와 타타르족을 격파하고 씨족 지도자들을 처형한 뒤 남은 전사들을 자신의 부하로 삼았다.
3. 3. 2. 부족의 지도자들과의 관계
테무진은 스텝 지역의 최고 실력자가 되려는 목표를 세웠고, 여러 부족 지도자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는 아버지 예수게이와 안다(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부의 부족장 토그릴 완 칸을 찾아갔다. 테무진은 왕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접을 받았고, 아버지 예수게이가 정혼해준 아내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에게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고, 테무진의 어릴 적 친구인 자무카도 병력을 제공하도록 설득했다.[12]그러나 자무카의 일족 중 한 명이 테무진의 영지에 있던 말을 약탈하려다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테무진과 자무카는 서서히 멀어졌다. 이후 자무카는 옹 칸의 장남 일카 센군과 테무진을 이간질하여, 1203년 옹 칸이 테무진의 지역을 습격하게 만들었다. 테무진은 오논강에서 북쪽으로 벗어나 바루쥬나 호수에서 군대를 재정비한 뒤, 계략을 써서 케레이트의 본영을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1205년 테무진은 나이만부와 메르키트부족을 격파하고, 자무카를 잡아 처형했다. 자무카는 부하들의 배신으로 테무진에게 넘겨졌으나, 테무진은 배신한 자무카의 부하들을 처형하고 자무카는 피를 보지 않게 처형했다.
3. 3. 3. 자르하족 정벌
자무카의 일족 중 한 사람인 다이차르가 테무진의 영지에 있던 말을 몰래 약탈하려다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테무진과 자무카는 서서히 멀어졌다.[12] 테무진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불만을 품은 자무카는 동생 차르파가 테무진의 부하들을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테무진은 13익(13개 부락)으로 군사를 편성하여 자무카와 교전했다.3. 3. 4. 타타르족 정복
Татарmn족은 몽골 고원의 유목 민족 중 하나로, 몽골 제국 성립 이전부터 몽골족과 오랜 갈등 관계에 있었다. 칭기즈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타타르족의 수장 테무진 우게를 사로잡은 것을 기념하여 아들의 이름을 테무진이라 지었을 정도였다.[8][9] 또한 예수게이는 타타르족에게 독살당해 사망했다.[11]1196년, 테무진은 금나라와 협력하여 타타르족을 공격했다. 금나라는 테무진에게 "수백 명의 사령관" 정도의 의미로 추정되는 칭호를 수여했다.[52][53] 1202년, 테무진은 타타르족을 완전히 격파하고 씨족 지도자들을 처형했으며, 남은 전사들은 자신의 부하로 삼았다.[63][67] 이때 테무진은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자들은 모두 죽이고, 아이들만 살려 몽골의 충실한 추종자로 키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몽골의 잔혹한 정복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언급되곤 한다.
3. 3. 5. 숙청 작업
테무진은 정적들을 제거하고, 케레이트족의 왕 토그릴 완 칸과의 동맹 관계를 파기하여 케레이트족을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12] 옛 정적과 귀족들을 살려두지 않고, 모든 유목민 부족을 통일하여 자신의 가문에만 충성을 바치도록 했다.테무진은 자신의 아들 주치와 토그릴의 딸을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토그릴의 아들 셍굼이 이끄는 케레이트족 엘리트들은 이 제안을 부족 통제 시도로 여겼고, 주치의 출생에 대한 의문은 그들을 더욱 불쾌하게 했다. 또한, 자무카는 테무진이 평민을 고위직에 진급시키는 것에 대해 스텝 귀족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지적하며, 사회 규범을 훼손한다고 주장했다. 토그릴은 이러한 요구에 굴복하여 테무진을 매복하려 했지만, 계획이 발각되어 실패했다. 테무진은 칼라칼지드 모래 전투에서 패배했지만,[12] 발주나 언약을 통해 흩어진 병력을 다시 모았다.
이후 몽골군은 제제르 고원에서 케레이트족을 매복하여 결정적으로 승리했다. 토그릴과 셍굼은 도망쳤고, 셍굼은 티베트로 탈출했지만, 토그릴은 나이만족에게 살해되었다. 테무진은 케레이트족 엘리트를 자신의 부족에 흡수하여 승리를 확정했다. 그는 공주 이바카 베키를 아내로 삼았고, 그녀의 여동생 소르가크타니 베키와 조카 도쿠즈 하툰을 막내 아들 툴루이에게 시집보냈다.[12]
3. 3. 6. 나이만족 정복
1199년, 칭기즈 칸은 케레이트 부와 연합하여 나이만 부를 공격하고, 나이만 왕국을 멸망시켰다.[12] 자무카는 나이만족 왕을 배신했지만, 테무진은 자무카의 부하들을 처형하고 자무카를 명예롭게 처형했다.[12] '원조비사'에 따르면, 자무카는 그의 어린 시절 andamn에게 자신을 명예롭게 처형해 달라고 설득했다. 다른 기록에서는 그가 사지절단으로 살해되었다고 한다.[12]3. 3. 7. 케레이트와의 갈등과 대칸 즉위
1202년 테무진은 나이만, 메르키트 부족 연맹을 격파하고 고원 중앙부의 패권을 차지했다. 옹 칸과의 결혼 동맹이 무산되고, 1203년 옹 칸의 기습을 받았으나, 발주나 호수에서 군대를 재정비하여 케레이트 본대를 급습하여 대승했다.[12] 이 패전으로 고원의 케레이트부는 괴멸되었고, 고원의 중앙부는 테무진의 손에 떨어졌다.1205년 테무진은 서나이만부와 북메르키트 부족을 격파하고, 동지에서 적이 된 자무카를 마침내 잡아 처형했다. 자무카는 부하들의 배신으로 테무진에게 넘겨졌으나, 그는 배신한 자무카의 부하들을 처형하고 자무카는 피를 보지 않게 처형했다고 한다.
1206년 테무진은 쿠릴타이를 소집했고, 그해 2월 오논강변에서 열린 족장대회의에서 테무진은 칭기즈 칸('전 세계의 군주'라는 뜻)으로 추대되었다. 1206년 모든 스텝 지역을 통치하는 황제로 추대되었을 때 그는 수천 명에 달하는 피복속 부족의 사람들과 그 지역을 자신의 친·인척, 동료들에게 나누어 관리하게 했다. 그리하여 기존 부족·가문의 조직된 형태를 바꾸어 봉건제도와 유사한 조직을 만들어냈다.
3. 4. 몽골족의 통일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가 안다(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부의 토그릴 완 칸을 찾아갔다. 테무진 가족은 왕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접을 받았고,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가 정혼해준 아내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메르키트족은 예수게이가 빼앗은 여자인 훠엘룬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테무진에게 반감을 품고 보르테를 납치했다.
테무진은 토그릴 완 칸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보르테를 되찾았다.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에게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고, 테무진의 친구 자무카도 설득하여 병력을 지원하게 했다. 1182년 테무진은 키야트 부족의 부족장으로 선출되었다.
자무카의 일족 중 한 명이 테무진의 말을 약탈하려다 살해되는 사건을 계기로, 테무진과 자무카는 멀어졌다. 이후 테무진은 주르킨 부족을 제압하고, 타타르족을 격파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1201년경, 여러 부족들이 자무카를 구르칸으로 추대하고 테무진과 토그릴에 대항했으나, 예디 쿠난 전투에서 패배했다.
]1187년경, 테무진은 달란 발주트 전투에서 자무카에게 패배했다. 1204년,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나이만족을 격파하고, 메르키트족을 궤멸시켰다. 자무카는 테무진에게 넘겨져 처형되었다.
3. 4. 1. 칭기즈 칸의 지도력
1206년은 몽골과 세계 역사에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칭기즈 칸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몽골족은 통일되었고, 새로운 조직으로 재정비되었다. 동시대 페르시아인 알 가즈자니는 칭기즈 칸을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잔인하며, 마법과 기만에 능한 인물로 묘사했다.[1]칭기즈 칸이 활발한 정복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유 | 설명 |
---|---|
철저한 능력 위주 인사행정 | 계급이 미천하더라도 능력이 있다면 중용했고, 능력이 없으면 강등했다. |
개방적인 인재 흡수 | 이민족 출신도 능력만 있다면 받아들였다. |
뛰어난 군사력 | 승마 능력과 기동성이 뛰어난 군대를 보유했다. |
정확한 정보 수집 | 상인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
종교적 관용 | 기독교, 이슬람 등 다른 종교를 존중했다. |
내분 조성 | 정복 대상 국가가 다종교 사회인 경우, 특정 종교를 지지하여 내분을 유도했다. |
학식 활용 | 야율초재와 같은 학자를 등용하여 학식을 이용했다. |
3. 4. 2. 몽골군의 특징
칭기즈 칸의 군대는 10진법 체제로 조직되어 엄격한 기강을 유지했고, 보급품과 군비를 갖추었다. 부장(部將)들은 칭기즈 칸의 아들이거나 그에게 절대충성을 바치는 선발된 사람들이었다.칭기즈 칸은 군사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급변하는 외부 환경에 잘 적응했다. 처음에는 그의 군대가 사료가 필요 없는 튼튼한 초식동물인 몽골 조랑말을 타는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군대로 다른 유목민들은 패배시킬 수 있었지만, 도시를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곧 몽골군은 투석기, 쇠뇌, 사다리와 끓는 기름 등을 사용하여 규모가 큰 성읍도 함락시킬 수 있었고, 흐르는 강물을 다른 데로 돌려놓아 홍수가 일어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3. 4. 3. 유능한 참모들
칭기즈 칸은 나이만의 한 신하로부터 문화의 유용함을 배웠고, 금나라 출신의 야율초재로부터 농민과 장인들에게 과세할 수 있음을 배웠다.[1] 칭기즈 칸은 당초 중국 북부의 비옥한 전답을 말의 목초지로 만들 생각이었으나, 야율초재의 조언을 받아들였다.[1]3. 5. 정복 사업
1182년 테무진은 흩어졌던 옛 키야트 부족의 부족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자무카의 일족 중 한 명이 테무진의 영지에 있던 말을 약탈하려다 살해되는 사건을 계기로 테무진과 자무카는 서서히 멀어졌다.테무진은 토그릴의 봉신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동등한 동맹 관계였다. 1201년경, 여러 부족들이 보르지긴-케레이트 동맹에 대항하여 자무카를 지도자로 추대하고 '칸 중의 칸'을 의미하는 구르칸으로 선출했다. 테무진과 토그릴은 예디 쿠난 전투에서 이 연맹을 격파했고, 자무카는 토그릴에게 자비를 구해야 했다.
몽골 동부에서 완전한 지배권을 원했던 테무진은 1202년 타이치우드를 격파하고, 이어서 타타르족을 제압했다. 그는 씨족 지도자들을 처형하고 남은 전사들을 자신의 부하로 삼았는데, 이 과정에서 제베와 같은 유능한 인재를 얻기도 했다.
타타르족을 흡수한 후, 몽골 초원에는 서쪽의 나이만족, 동쪽의 몽골족, 그리고 그 중간의 케레이트족의 세 세력이 남았다. 테무진은 아들 주치와 토그릴의 딸의 결혼을 제안했으나, 케레이트족 엘리트들은 이를 부족 통제 시도로 간주하고 반대했다. 결국 토그릴은 테무진을 매복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테무진은 칼라칼지드 모래 전투에서 패배했다.
발주나 언약을 통해 테무진은 흩어진 병력을 재집결하고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을 모았다. 이들은 다양한 부족 출신으로, 종교와 상관없이 테무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몽골군은 제제르 고원에서 케레이트족을 매복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토그릴은 도망치다 살해되었고, 테무진은 케레이트족 엘리트를 자신의 부족에 흡수했다.
1204년 5월, 알타이 산맥의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나이만족은 패배하고 지도자 타양 칸은 살해되었다. 그 해 말, 메르키트족이 궤멸되었고, 자무카는 테무진에게 넘겨져 처형되었다.
3. 5. 1. 서하 정복과 위구르 복속
1209년 서하는 칭기즈 칸에게 복속하여 몽골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같은 해 톈산 위구르 왕국을 복속시키고 경제 감각이 뛰어난 위구르인의 협력을 얻는 데 성공한다.[1]서하는 1209년 칭기즈 칸에게 조공을 바치기로 했으나, 다시 반발하였다. 칭기즈 칸은 중국 북서쪽 변방 지역의 국가인 서하와 싸워 승리하였다.[1]
3. 5. 2. 금나라 공략
1213년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를 공략, 만리장성 이남의 금나라 영토를 정복했다.[1] 1214년 칭기즈 칸은 금나라와 화약을 맺고 일단 군사를 후퇴시켰지만, 화약 직후 금나라가 황하 남쪽의 옛 북송의 도읍 개봉으로 수도를 옮기자 칭기즈 칸은 이를 배신 행위로 규정하고 다시 금나라를 공격했다.[1]1215년 몽골군은 금나라의 수도 연경(현재의 베이징)을 포위, 함락시켰다.[1] 이때 야율초재가 칭기즈 칸에게 등용되어 그의 측근이 되었다.[1] 연경을 함락시킨 칭기즈 칸은 장군 무칼리에게 화북 경영과 금나라와의 전쟁 준비를 맡기고 고원으로 돌아갔다.[1]
3. 5. 3. 서요 정복
쿠츨루크는 나이만 부족 연합 부족장의 아들로, 나이만족이 멸망한 뒤 서요로 망명하여 야율직로고의 보호를 받으며 그의 사위가 되었다. 그러나 쿠츨루크는 야율직로고를 배신하고 왕위를 찬탈했다.[1] 서요의 혼란을 접한 칭기즈 칸은 쿠츨루크 토벌을 선언하고 추격하였으나, 몽골군의 주력은 서하에 대한 계속적인 원정으로 피폐해져 첫 서요 원정은 실패하였다.[1] 칭기즈 칸은 장군 제베에게 2만 군을 주어 선봉대로 보내 쿠츨루크를 맡도록 했다.[1]쿠츨루크는 불교로 개종하고 현지의 무슬림을 억압하고 있었는데, 몽골이 보낸 밀정이 이를 칭기즈 칸에게 보고하였다.[1] 몽골 밀정이 내란을 선동하자 서요 왕국은 분열되었고, 제베는 군사를 이끌고 가 적국을 크게 격파했다.[1] 쿠츨루크는 카슈가르 서쪽으로 도주하였으나 몽골에게 붙들려 처형되고, 서요의 영지는 몽골에 병합되었다.[1] 이 원정의 성공으로 1218년까지 몽골 제국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발하슈 호까지 확대되고, 남쪽으로 페르시아 만, 서쪽으로 카스피해와 호라즘 샤 왕조를 접하게 되었다.[1]
3. 5. 4. 호라즘 정복
칭기즈 칸은 450명의 이슬람 대상단이 몰살당한 사건을 계기로 호라즘 샤 정벌에 나섰다.[1] 이 정벌에는 그의 아들 오고타이와 차가타이 등이 동행했다.[2]3. 5. 5. 철저한 섬멸전
몽골군은 가는 곳마다 도시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몰살시키는 등 잔혹한 행위를 자행했다.[38] 전답과 화원은 황폐화되고 관개 시설은 파괴되었다.[38] 1223년 몽골군은 철수했고, 1226~1227년 서하를 상대로 마지막 전역에 나섰다가 1227년 8월 18일에 사망했다.[38]3. 5. 6. 비판
정복지 국민이 멸족당한 예는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일로, 칭기즈 칸과 몽골 제국의 잔학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비판받는다. 몽골족은 가는 곳마다 도시를 불태웠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동족이라도 자신들보다 높은 신분이라면 모두 몰살시키는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강요받았다.[1] 칭기즈 칸이 호라즘 샤를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전을 펼쳐나가는 동안 전답과 화원은 황폐화되었고 관개 시설은 파괴되었다.[1]칭기즈 칸은 주변 국을 확장해나가면서 자신에게 협력할 경우 자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러 가지 혜택을 부여했다. 그러나 반항하게 되면 그 지역 전체를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조리 멸족시켰는데, 전멸시킨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서 탑을 쌓았다.[2] 바그다드와 이스파한 등의 지역에는 거의 100,000개가량 되는 해골들로 탑을 쌓기도 했다.[2] 특히 샤리 골골라의 경우 정복 활동 도중 칭기즈 칸의 손자인 모토칸(또는 무투겐)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므로 칭기즈 칸의 분노를 사서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두 죽일 뿐만 아니라 모든 건물을 없애버려 전대미문의 폐허로 만들면서 멸망시켰다.[2]
3. 5. 7. 금나라 정복
1213년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를 공략, 만리장성 이남의 금나라 영토를 정복하고 병합했다.[40] 1214년 칭기즈 칸은 금나라와 화약을 맺고 일단 군사를 후퇴시켰지만, 화약 직후 금나라가 몽골의 공세를 두려워하여 황하 남쪽의 옛 북송 도읍 개봉으로 수도를 옮기자 이를 배신 행위로 규정하고 다시 금나라를 공격했다.[40]1215년 몽골군은 금나라의 기존 수도 연경(현재의 베이징)을 포위, 함락시켰다.[40] 이후 후계자 오고타이 칸 시대에 중국 행정에 활약하게 되는 야율초재는 이때 칭기즈 칸에게 나타나 그의 측근이 되었다.[40] 연경을 함락시킨 칭기즈 칸은 장군 무칼리를 연경에 잔류시켜 그 후 화북 경영과 금나라와의 전쟁 준비 계획을 맡겼으며, 그는 고원으로 되돌아갔다.[40]
칭기즈 칸의 금나라 정복은 1211년에 시작되어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그의 후계자 시대인 1234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40] 몽골인들은 중국의 오래된 전투 방법인 공성전을 다루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그들이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학살 방법은 인구가 많은 중국인들에게 큰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40] 또한 여진은 정주한 지 100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목민의 용맹함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40] 1213년에는 선화를 정복하고 산서 중부를 돌파하여 태원과 평양을 빼앗았다.[40] 이후 남으로 기수를 돌려 하북과 산둥 평원을 가로질러 하간과 제남을 함락시켰다.[40] 칭기즈 칸이 북경을 봉쇄 작전으로 공격하려고 했을 때, 금나라 조정에는 궁정 분란이 일어나 폐제가 호사호에게 암살당하였고, 호사호는 폐제의 조카인 오도보(선종)를 제위에 앉혔다.[40] 당시 북경을 공격하고 있었으나 잇따른 실패와 물자 부족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칭기즈 칸은 오도보의 화의를 받아들이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였다.[40]
3. 6. 서하 재원정과 최후
칭기즈 칸은 중앙아시아 원정에서 돌아온 후 영지를 분할하여 주치에게는 남서 시베리아에서 남쪽 러시아 땅 및 미래에 정복할 수 있는 모든 토지를, 차가타이에게는 중앙아시아와 서요의 옛 땅을, 우구데이에게는 서쪽 몽골 및 위구르, 나이만, 타타르, 중가리아의 지배권을 주었다. 칭기즈 칸에게 종주권을 약속한 서하의 황제가 호라즘 원정에 원군을 보내는 것을 거절하자, 칭기즈 칸은 이를 괘씸히 여겨 다시 서하 공격을 선언했다.[60]1226년 가을, 칭기스 칸은 서하에 대한 재원정을 개시했다. 칭기스 칸은 사고로 말에서 낙마한 뒤에 열병을 겪었고, 이에 아들들은 원정을 만류했지만 칭기스 칸은 원정을 강행했다. 칭기스 칸은 우선 서하에 사신을 파견해 서정에 동반하지 않고 그 자신을 모욕한 것을 책망하며 항복을 제의했으나, 서하는 이를 거부했다.[60] 칭기스 칸은 서하의 도시 대부분을 점령했고, 1226년 여름에는 서하 군대를 격파했다.[61][62] 이후 몽골군은 서하의 수도 흥경을 포위했다. 그때 칭기스 칸은 남하하여 육반산 남쪽에서 야영했다. 라시드 앗딘은 이 남하의 목적은 칭기스 칸이 남송이었다고 적었다.[63] 육반산 남쪽에 머무르던 칭기즈 칸은 서하에 사람을 보냈고, 서하에서는 곧 항복을 약속했다.
그때 서하는 칭기스 칸에게 사신을 보내 한 달 뒤 주민들을 이끌고 도시 밖으로 나와 항복하겠다고 제의했고, 칭기스 칸은 이를 허락했다.[64] 하지만 그해 8월 초 칭기즈 칸은 갑자기 중태에 빠졌다가 깨어났다. 죽음을 앞둔 칭기스 칸은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65] 1227년 8월 18일[66] 또는 8월 25일[67], 칭기스 칸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서하의 수도 흥경은 함락되고 그 주민들은 학살당했다.[67]
3. 7. 사후
칭기즈 칸의 아들과 손자들은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지만, 칭기즈 칸 자신은 남자가 때때로 술에 취하지 않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말했다.[44]몽골고원으로 옮겨져 기련곡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지지만, 그 위치는 비밀에 부쳐졌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의하면 칭기즈 칸의 시신을 운반한 사람은 비밀 유지를 위해 모두 살해되었다고 한다. 또한 매장된 후에는 몽골은 그 증거를 없애기 위해 1천 마리의 말을 몰고 일대의 땅을 완전히 밟아 다졌다고 한다.[44]
몽골비사에는 다른 설도 있는데, 어떤 이는 부르칸 칼둔 산에 묻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알타이 산의 북쪽, 켄테이 칸 산의 남쪽에 있는 예케 우텍에 묻었다고도 한다.[44]
1990년 냉전 종식 이후 각국의 조사단은 칭기즈 칸의 매장지를 물색하고 있지만, 몽골에서는 땅을 파는 것을 싫어하고, 외국인에 의해 발굴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있다고 한다.[44] 2004년 일본의 조사단은 울란바토르에서 동쪽으로 250km 떨어진 케를렌강의 한 초원 지대에서 칭기즈 칸의 오르드 흔적을 찾은 것으로 추정한다.[44] 시카고 대학교의 존 우즈 교수는 2001년 헨티 산맥의 구릉지대에서 높이 약 2.7m~3.6m의 벽돌벽이 일시적으로 약 3.2km에 걸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44]
4. 가족 관계
배우자 | 자녀 |
---|---|
광헌익성황후 홍길랄씨 | |
홀란 황후 올와사씨 | 6남: 활렬견 |
야수 황후 탑탑아씨 | |
야속간 황후 탑탑아씨 | 7남: 찰올아 (요절) |
합답안 황후 속륵손도씨 | |
공주 황후 완안씨 | |
미상 | |
홀로륜 황후 | |
활리걸담 황후 | |
탈홀사 황후 | |
첩목륜 황후 | |
역련진팔랄 황후 | |
불안홀독 황후 | |
고야별속 황후 | |
역걸렬진 황후 | |
탈홀사 황후 | |
홀로합랄 황후 | |
아실륜 황후 | |
독아합랄 황후 | |
찰합 황후 이씨 | |
아석미실 황후 | |
완자홀도 황후 | |
홀답한 황후 | |
알자홀사 황후 | |
연리 황후 | |
독해 황후 | |
모개 황후 | |
아복합 황후 | |
황비: 홀승해 비자 | |
황비: 야간 비자 | |
황비: 야축 비자 | |
황비: 야진 비자 | |
황비: 야리홀독 비자 | |
황비: 찰진 비자 | |
황비: 합랄진 비자 | |
황비: 내만녀 비자 | |
황비: 혼도로알 비자 | |
황비: 홀로회 비자 | |
황비: 날백 비자 | |
황비: 완자 비자 | |
황비: 금련 비자 | |
황비: 완자태 비자 | |
황비: 노륜 비자 | |
황비: 묘진 비자 | |
황비: 쇄랑합 비자 | |
황비: 숙량합 비자 | |
황비: 팔불별걸 비자 | |
황비: 탑탑아녀 |
5. 평가
칭기즈 칸은 몽골에서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는 칸이 되기 전에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몽골 연맹을 통합하여 흩어져 있던 부족들에게 동질감을 형성하였다.[53]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 예수게이가 메르키트족에게 빼앗았던 여인인 어머니 호엘룬에게서 테무진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테무진은 메르키트족에게 아내 보르테를 빼앗겼으나, 아버지의 의형제였던 케레이트족의 토그릴 완 칸의 도움으로 아내를 되찾고 세력을 키웠다. 어릴 적 친구인 자무카와 함께 세력을 키웠지만, 자무카 일족 중 한 사람이 테무진의 말을 약탈하려다 살해되는 사건을 계기로 둘 사이는 멀어졌다.
이후 테무진은 여러 부족과의 전투를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 1206년 쿠릴타이에서 몽골 제국의 칸으로 추대되어 칭기즈 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칭기즈 칸은 서하, 금,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제국 등 수많은 국가를 정복하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몽골 제국을 건설했다.[53] 그의 정복 활동은 잔혹한 학살과 파괴를 동반하기도 했지만, 몽골 제국에 의한 평화 시대를 열고 동서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등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5. 1. 긍정적 평가
칭기즈 칸은 몽골족을 통일하고 몽골 제국을 건설하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군사 지도자로 평가받는다.[53] 뛰어난 군사 전략과 리더십으로 몽골 제국을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며, 몽골 제국의 건설은 동서 문화 교류를 촉진하고 유라시아 대륙의 지정학적 변화를 가져왔다.[53]칭기즈 칸은 철저한 능력 위주의 군 인사행정을 펼쳤고, 출신에 상관없이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했다. 또한, 뛰어난 기동성을 가진 기마병을 적극 활용하였으며, 상인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정복 대상 국가의 종교적, 사회적 상황을 이용하여 내분을 유도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야율초재와 같은 학자를 등용하여 학식을 활용하기도 했다.
몽골족에게 칭기즈 칸은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준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흩어져 있던 몽골 부족들을 통합하여 동질감을 형성하게 하였고,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하여 몽골 제국에 의한 평화 시대를 이루고, 인구학과 지정학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켰다고 평가받고 있다.
5. 2. 부정적 평가
칭기즈 칸의 정복 활동은 잔혹한 학살과 파괴를 동반하여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초래했다.[53] 특히 이슬람 세계에서는 그의 정복 활동이 문명의 파괴를 불러왔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다. 정복당한 국가들에게는 침략자이자 파괴자로 인식되기도 한다.[54]5. 3. 현대적 평가
무자비하고 잔인한 정복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칭기즈 칸은 몽골에서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는다.[53] 칸이 되기 이전에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몽골 연맹을 통합하여, 흩어져 있던 부족들에게 동질감을 형성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 칸은 역설적으로 가장 넓은 지역에 전쟁의 처참함을 가져온 후에 가장 분쟁이 적은 평화의 시기를 가져왔다고 평가되고 있다.서하와 금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제국을 포함한 수많은 정복을 통하여 무수히 많은 나라를 합병하였다.[53] 칭기즈 칸은 몽골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 몇 세기 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넓은 영토를 통치했던 몽골 제국은 몽골 제국에 의한 평화 시대를 이루고, 인구학과 지정학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켰다. 몽골 제국의 영토는 현대의 몽골, 중국,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몰도바,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이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 일부, 터키 일부를 포함하는 것이다.[53] 몽골군은 1260년 봄, 훌라구 칸의 부관인 키트부카의 지휘 하에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를 출발하여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까지 진출했다.[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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